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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에 대한 국가관리 사례 : 미국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미국은 대마의 재배와 관련 산업이 융성하던 국가였다. 이때까지 미국에서 대마 사용은 섬유, 의료, 기호용으로 다양하 게 사용되어 왔다. 미국 독립 이후 대마는 사람들의 의복 등에 사용하는 일반 섬유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1793년 조면기의 발명으로 섬유시장에 서 대마의 비율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이와 달리 대마를 의약품으 로 사용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졌다. 18세기 중반까지 대마는 염증, 식욕부진, 우울증, 류머티즘, 통증 등 다양한 질환에 가장 많이 처방되는 의약품이 되었다. 특히 대마는 진통 치료에 뛰어난 효과를 보였는데,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모르핀이 등장한 18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의약품으로 사용하는 비율 역시 줄어들게 되었다.

 

 

의약품으로써의 사용이 줄어들면서 기호품(recreational drug)으로서의 사용은 급증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대마와 해시시는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기호품으로 자리 잡았다. 대마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나 문제제기 또한 미미하였다. 특히, 하시시(hashīsh)는 예술문화계 종사자와 유럽에서 온 초기 이주자를 중심으로 급속도 퍼지기 시작하여, 하시시 애호가 모임인 ‘하시 클럽(Hash Club)’은 사회의 저명한 엘리트 지식인들로 만원을 이룰 정도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대마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나 문제제기가 사회적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기호용 대마의 위축되기 시작한 계기는 1937년「마리화나 세금법」이 공포된 후부터였다. 이 법은 대마의 재배나 유통을 금지하는 법은 아니었지만, 등록의 의무화와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대마 재배와 유통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리화나 세금법」을 주도했던 것은, 연방마약관리국(Federal Bureau of Narcotics, FBN) 국장 헨리 안스링거(Henry Anslinger)였다. 안스링거를 추천한 사람은 미국 6위의 은행인 멜론은행의 소유주로 경제공황기에 재무장관을 지낸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거물 앤드류 멜론(Andrew Melon)이었다. 정재계에서 대자본의 이익을 옹호했던 멜론은 멜 론은행의 대고객 중의 하나인 거대 화학자본의 소유주 듀퐁(Dupont)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강력한 로비를 벌였고 멜론은 자신의 처조카인 안스 링거를 통해 「마리화나 세금법」을 제정할 수 있게 했다.

 

1930년대 중반에 등장한 대마박피기와 추수기는 듀퐁에게는 대단한 위협이었다. 더불어 대마의 껍질에서 자동적으로 섬유를 추출할 수 있는 기계도 선을 보이고 있었다. 듀퐁은 1937년「마리화나 세금법」이 제정되고 나일론과 레이온의 특허와 목재펄프를 다루는 황화공정 기술의 특허를 확보를 통해 기술을 도입하였다. 듀퐁은 강력한 라이벌을 물리치기 위해 멜론을 통해 강력한 로비를 벌였고, 결국 「마리화나 세금법」이 통과되게 되었다. 듀퐁, 멜론, 안스링거와 더불어 대마의 불법화를 주도한 사람은 미국의 2대 신문왕으로 일컬어지고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의 창시자로 거론되는 월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f Hearst)였다. 허스 트는 광대한 삼림지를 소유하면서 제지공장에 목재를 공급하고 있었는데 대마펄프를 원료로 하는 기계화된 제지공법의 발전은 허스트의 제지산업을 위협하였다. 대마는 나무와 달리 매년 수확이 가능한 작물이었고, 1 에이커(acre)에서 생산되는 대마로 4.5 에이커에서 생산되는 목재를 대체할 수 있었다. 이 공법은 1930년대 중반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어 보급될 조짐이 보였고, 허스트에게는 종이를 원료로 하는 잡지 산업의 불황을 야기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의 신문과 잡지에 쇼킹하고 선정적인 대마 관련 보도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인종차별을 핵심으로 하였다. 멕시코인과 흑인들을 게으르고 폭력적 인종으로 묘사하였고, 유색인종들을 폭력적으로 만드는 주된 원인을 대마라고 선전했다.

 

 

허스트의 신문들이 대마와 관련해 유포한 광고의 전형(stereotype)은 ‘대마를 피우면서 백인 여자를 겁탈하는 멕시코인과 흑인’의 이미지였다. 허스트 등이 운영하는 황색언론들의 집요한 반(反)대마 캠페인은 인종차별주의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백인들의 인식을 부정적으로 변화시켰으며, 「마리화나 세금법」의 제정 이후 대마의 재배 및 관리는 국가의 엄 격한 규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대마의 사용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점차 늘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젊은이들의 인기가 높았던 대중 음악인들과 재즈 뮤지션을 중심으로 전쟁의 경직된 체제에서 벗어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젊은이들 속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안스 링거는 ‘재즈 뮤지션의 절반 이상이 대마를 피우고 있다’(CBS News. 2008.9.13.)고 주장과 함께 많은 뮤지션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이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강한 반발을 일으켰다. 대마를 경험한 사람들로 인해 대마가 폭력을 유발한다는 맹목적 논리는 점차 설득력을 잃었고, 대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점차 확산되었다. 결국 안스 링거를 포함한 대마 금지론자들은 새로운 논리로 대마를 막으려 했다.

 

1951년 메카시즘(McCathyism)으로 조장된 광기 어린 정치적 상황에서 안스 링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마 사용자에 대한 처벌을 더욱 강화시킨 「보그스 법(Boggs act)」을 만들었다. 이 법안의 심의과정에서 안스 링거는 ‘관문 이론’을 주장했다. 관문 이론은 오늘날은 비현실적인 허구로 평가되고 있으나, 당시에는 대마가 불법약물의 관문이 될 수 있다는 불안 감을 조성하는데 충분하였고, 매카시즘의 분위기에서 관문이론은 암묵적으로 수용되었다.

 

「보그스 법」심의를 위한 청문회의 내용 중 대마 합법화 찬성자인 이스벨(Harris Isbell) 박사가 제출한 자료 내용을 보면 ‘대마 흡연자들은 대개 가볍게 취한상태초 큭큭대며 웃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즐거운 시간을 가질 뿐이다. 쓰러지거나, 비틀 거리지도 않으며, 남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는다. 대마 흡연으로 폭력적인 범죄가 야기된다거나, 성범죄의 원인이 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대마는 흡연 후에도 불쾌함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또한 대마는 아무 때라도 사용을 중지할 수 있는데, 이는 의존성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담배 끊는 것보다 대마를 끊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기존에 대마 반대론자들의 주장에 근거가 없음과 중독성에 대해 반박하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한 안스링거의 답변은 ‘대마의 위험성은 이런 것이다. 헤로인에 중독된 젊은이들의 50% 이상이 대마를 사용했다. 대마 흡연을 시작한 사람들은 나아가 헤로인에 손을 대게 된다. 이는 대마에 대한 흥미가 감소가 주사기를 들게 된 것.’라고 반박하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주장은 대마가 다른 마약에 관문이 된다는 주장이었고. 매카시즘에 힘입어 대마 사용자에 대한 처벌이 더욱 강화되는 「보그스 법」통과의 근거가 되었다.

 

한편, 1960년대에는 히피문화와 저항정신에 힘입어 대마 단속법에 저항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60년대 신좌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사회주 의자였던 앨런 긴스버스(Allen Ginsberg)는 1961년 ‘존 크로스비 쇼’에 출 연하여 대마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대마 단속에 대해 비판했고, 함께 출연한 출연진 또한 이에 동의했다. 이를 계기로 당시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젊은이들 사이에서 대마는 자유주의적 진보세력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1961년 민주당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John F. Kennedy)이 당선되면 서 정부차원에서도 대마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점차 느슨해졌다. 케네디 행정부는 1963년 ‘마약 및 마약남용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the resident s Commission on Narcotics and Drug Abuse: the Prettyman Commissi on)’를 설립하였고, 대마를 다른 마약류와 구분했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 전 이후 내에서 반전운동이 진행되던 1960년대 후반, 미국 내 보수세력들 에 의해 대마에 대한 규제는 다시 강화 되었다.

 

1968년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John Edgar Hoover)는 ‘대마를 피우 는 신좌파들을 마약사용위반혐위로 체포 하는데 집중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같은 존슨 행정부는 마약법을 집행하는 기관을 재조직 하였다. 마약 남용통제국(Bureau of Drug Abuse Control, BDAC)과 연방마약국(Federa l Bureau of Narcotics, FBN)을 폐지하고. 법무부 산하의 마약국(Mureau of Narcotics and Dangerous Drugs, BNDD)을 신설하여, 급증하는 대마 밀수에 대한 단속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마 합법화 세력 ‘대마법 개혁을 위한 전국조직(National Organization for Reform of Marijuana Laws, N ORML)’을 결성해서 정부의 탄압에 맞섰다.

 

1960년대 내내 마리화나는 보수적인 권력과 진보적 사회세력의 충돌 지점이었다. 보수세력은 진보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구실로 마리화나를 이 용하였고, 진보세력에게는 진보적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70 년 닉슨 행정부가 들어서자, 마리화나에 대한 제제는 더 강력해졌다. 미 의회는 마리화나를 의료용으로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강력한 규제를 포함하는「포괄적 마약남용방지 및 통제법(Comprehensive Drug Abuse evention and Control Act, 일명 Controlled Substance Act)」을 제정하였다.

 

1970년대 베트남 전쟁은 진보와 보수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이슈였다. 이 시기에 대마는 반전과 평화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1971년 4월 워싱턴에서 50만 명이 모인 대대적인 반전 시위가 일어났고, 6월13일 펜 타곤 비밀문서(Pentagon Papers)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터진 지 나흘 뒤인, 6월 17일에 닉슨 행정부는 ‘마약과의 전쟁(War on Drugs)’을 선 포한다. 이를 두고 베트남에서의 미국 정책 실패에 대한 관심을 꺾기 위 한 수단이었다는 평가가 다수 있다.

 

1973년 닉슨 행정부는 법무부 산하의 마약국(BNDD)과 집행기관인 OD ALE(Office of Drug Abuse Law Enforcement), 세관과 CIA의 관련 조직 등 6개의 마약 관련 단속기관을 통합하여 마약단속국(Drugs Enforcement Administration, DEA)을 신설하였다. 1961년 미국은 마약의 소지와 사용, 수입과 수출, 유통, 제조 및 생산을 의학적, 과학적 용도에만 한정하는 ‘유 엔마약단일협약(Single Convention on Narcotic Drugs)’ 16)을 맺어, 자신의 정책을 국제적으로 확산시켰다.

 

이 협약에는 규정하는 강력한 마약에 범위에는 대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또한 25년 내에 대마초의 재배와 사용을 근절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미국의 반대마정책은 1971년에 향정신성 물질의 광고를 금지하는 국제 협약인 ‘향정신성 물질협약(Convention on Psychotropic Substances)’을  맺고, 이어 1988년에는 1961년의 협약한 ‘유엔 마약 단일협약’에 국제적 공조, 범인 인도 및 몰수 조항을 강화시킨 ‘비엔나마약및향정신성물질불법 거래금지협약(Vienna Convention against the Illicit Traffic of Narcotic Drugs and Psychotropic Substances)’을 맺어 더욱 강화하였다.

 

유엔은 유엔마약단일협약 이후, 3개의 협약 이행을 감독하는 기구인 국제마약감시기구(International Narcotics Control Board, INCB)을 설립하여 활동을 강화하였고, 현재까지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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